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지 마립간 (문단 편집) === 오기일([[정월 대보름]]) ===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조>에 나오는 이야기로 무진년(488년)에 소지 마립간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까마귀가 향하는 곳을 찾아가시오. 놀란 마립간은 기병에게 명령하여 뒤따르게 했다. 남쪽의 피촌에 이르렀을 때, [[돼지]] 2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병들은 멈춰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오늘날 [[경주시]] 서출지 연못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에는 이런 예언이 씌어 있었다.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사신이 와서 글을 바치자 마립간은 처음에 "둘이 죽는 것보다 뜯어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지 않나?"라고 했는데 이때 일관(점쟁이)이 "감히 아뢰옵니다만 점을 쳐 보니 두 사람은 일반 백성이지만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경진(소설가)|"뜯어보지 않으면 누가 죽습니까?]] [[답정너|바로 니가 죽습니다."]]-- 이에 놀란 마립간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뜯어 보니, 이렇게 써 있었다. >'''"射琴匣(사금갑)" = 거문고 갑을 쏴라''' 마립간이 궁궐로 속히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자 그 속에서는 내전의 분향을 수도하는 [[승려]][* 소지 마립간 때는 아직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시점이지만, 공인 이전에도 불교는 이미 신라에서 포교가 진행되고 스며들고 있었다. 법흥왕의 공인은 불교를 나라의 [[국교]]로 지정하는 것이었다.]와 왕비[* 《[[삼국유사]]》에서는 애매하게 궁주라고 칭해지고 이를 [[후궁]]에 해당하는 신분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삼국사절요]]》에서는 확실하게 왕비라고 나온다. 《[[삼국유사]]》는 김소지의 왕비를 김습보의 딸로, 《[[삼국사절요]]》는 김소지의 왕비를 김내숙의 딸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혼동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사강목]]》에서는 왕후 선혜부인(善兮夫人)이라고 직접 서술하였다. 김소지 사후 왕위를 김내숙의 아들 김물력이 아니라 김습보의 아들 [[김지대로]]가 계승하는 것이 이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가 은밀히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가 숨어 있었다.[* [[일본]] [[정창원]]에는 현존하는 [[정창원 신라금|신라금 유물이 있는데,]] 케이스인 금갑의 길이가 무려 187cm나 되므로 충분히 사람이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을 처형[* 거문고갑에 화살을 쏘아보니 비명과 함께 피가 흘러서 서둘러 안을 확인한 결과 사람 시신 두 구가 있는데 둘 다 칼을 들고 있는 걸 보아, 자객이 거문고갑 안에 매복하던 중 [[일타쌍피|그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하여 예언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해(上亥, 첫 날), 상자(上子), 상오(上午)일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며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하여 찰밥으로 제사지냈다. 이것으르 속어로는 '달도'라고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모든 일을 금한다는 말이다. 오기일은 바로 오늘날의 '''[[정월 대보름]]'''이다. 사실 대보름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1,000년 이상을, 어찌보면 [[설날]]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를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있어 성대하게 놀면서 치르는 큰 명절이었는데, 현대에 들어 대보름이 [[공휴일]]에서도 제외되고[* [[북한]]에서는 지금도 대보름이 공휴일이다.] 의미가 약해지면서 소지 마립간의 <오기일 설화>도 약간 묻힌 감이 있다. 또 노인이 나와 글을 바쳤다는 그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부르게 했다고 하는데 서출지 연못은 지금도 있는데 경주 시가지 남동쪽에 있고 통일전 바로 옆이다. 호수에는 조선 시대에 지은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 현대에는 경주의 야경 명소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 종전에는 불교 세력과 토착 종교 세력의 갈등으로 풀이했지만 이러한 연구는 문제가 있었다. 우선 토착 종교 세력으로 간주되는 '노인'에게선 전혀 반임금, 반왕실 그리고 반불적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사실. 중과 비빈이 간통한 것과 소지 마립간이 죽을 것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당시 신라의 주적이었던 고구려 장수왕 측의 간첩을 통한 소지 마립간 암살 시도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소지 마립간은 재위 내내 밝혀진 아들이라곤 벽화에게서 얻은 아들 하나 뿐이었고 게다가 저 사금갑 사건 때는 아들이 없었다. 10대 후반에 즉위했는데 30대 중반에 이르도록 아들이 없었다는 건,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고 있는 소지 마립간의 6촌형 김지도로, 즉 훗날의 지증왕에게 왕좌를 향한 모종의 희망을 주는 큰 정치적 불안요소였다.[* 결국 소지 마립간의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고만다.] 이런 상황에서 틈을 엿보던 고구려의 장수왕은 앞서 개로왕에게 써먹어서 성공했던 수법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동원하였다. 즉 백제에 [[도림]]을 보내서 백제를 흔들었듯 첩자 승려를 보내서, 그때까지 아들을 낳지 못해 폐출 위기에 몰려 있던 선혜부인에게 접근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이런 흉계를 소지 마립간의 친불교 정책에 반감이 있었던 전통 종교 세력이 포착했고, 소지 마립간은 위기를 벗어났지만 대가가 있었다. 이 당시에 포교를 위해 오던 신라 내 승려들은 대부분 고구려에서 오는 승려들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신라는 법흥왕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완전 반불 국가가 되고만다. 이후 간첩이 아닌, 포교를 위해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이 흥분한 신라 군인들에게 맞아죽는 일이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 나중에 불교를 공인하지만 그것도 고구려와는 관련없는 경로로 받아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